대통령 사촌까지 연루?… 나라 뒤집은 ‘15조 원 비리’에 필리핀 청년들 ‘들끓는 분노’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분노의 물결이 필리핀 전역을 휩쓸었다. 수도 마닐라를 비롯한 최소 20개 도시에서 수만 명의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 공공사업을 둘러싼 거대한 비리 카르텔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202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저항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특권층의 부패에 눈감지 않겠다는 필리핀 ‘Z세대’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로 해석된다. 특히 이번 시위는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지 53년이 되는 날에, 과거 그를 축출했던 ‘피플파워’ 혁명의 성지 루네타 공원에서 열려 그 상징성을 더했다.이번 시위의 도화선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인 홍수를 막기 위해 편성된 막대한 규모의 기반시설 사업 예산이 줄줄 새나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필리핀 정부는 2023년부터 3년간 홍수 대비 사업에 약 15조 원(6160억 필리핀 페소)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정부 독립위원회와 상원의 조사 결과 일부 시설은 부실 시공되거나 아예 지어지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한 재정 피해액은 최대 2조 88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설상가상으로 상원 청문회에서는 한 건설사 대표가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사촌인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포함한 국회의원 17명에게 뇌물을 건넸다고 폭로하면서 국민적 공분은 극에 달했다. 결국 거센 비판 여론에 밀려 하원의장과 상원의장이 모두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시위 현장은 부패한 권력을 향한 청년들의 창의적이면서도 처절한 분노로 가득 찼다. 일부 시위대는 홍수 피해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진흙을 뒤집어쓴 채 행진했고, 인도네시아 청년 시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인기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해적 깃발이 등장하며 아시아 청년 세대의 연대를 보여주기도 했다. 시위대는 비리에 연루된 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홍수 피해자들의 의료, 교육, 주거 지원에 사용하고, 관련 공무원들을 즉각 파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시위 지도부는 “국민들은 홍수로 고통받는데, 비리 연루자들은 소셜미디어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과시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고, 간호학과 학생이라고 밝힌 한 청년은 “직접 홍수를 헤쳐나간 경험이 있다. 이 모든 부패가 정말 부끄럽다”며 기득권층의 파렴치함을 비판했다. 이번 필리핀 시위는 인도네시아, 네팔, 동티모르 등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 아시아 청년들의 반부패·불평등 시위 물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더욱 주목된다.